
동화童話
김수환 X @thanks_dy
* 이윤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 입니다.
* 김기림 시인의 작품을 인용하였습니다.
쥬피타 추방 -이상의 영전에 바침
바다
올배미의 주문
동화
해상
나의 소제부
바다와 나비
뮤즈. 김수남
0. 쥬피타 추방
[쥬피타 얼굴에 장미 같은 웃음이 눈보다 차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
'쥬피타 추방' 이라고 쓰인 제목 옆에 다시 펜을 끌어다 놓는다. 내 손으로 지은 시지만 나는 시의 주인이 아니다. 푸석한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그의 이름을 윈고지에 녹인다. '이윤의 영전에 바침.' 완성된 원고지를 보면 눈물이 툭 터져나올것도 같았지만, 건조한 슬픔이 더욱 단단하게 응어리질 뿐이다. 그의 손길이 한 번쯤 닿았을 지 모르는 종이뭉치를 움켜쥔다. 누런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비웃음을 흘린다. 감히 시인을 비웃는 종이의 재롱을 따라 나도 피식 웃었다. 사람이 없으니 공간만 늘어, 텅 빈 편집실의 공기는 상실의 무게처럼 무겁다. 지독한 무(無)의 존재를 느끼며 창 너머를 응시하다가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나의 벗, 나의 쥬피타, 나의 태양이 사라진 세상에도 여전히 밝은 햇살이 밉다.
윤이 형을 마지막 만났던 날도 지금처럼 어두운 골방의 창 밖으로 조각하늘이 밝았다. 미약한 한줄기 햇살이 사람은 말고 종이만 비추었다. 책상에도 바닥에도 원고지가 수북했다. 그는 난방이 잘 되지 않는 차가운 방바닥에 앉아있었다. 허옇게 거칠은 피부에 마른 입술이 병세를 뚜렷이 나타내었다. 종이뭉치를 치우고 그의 옆에 앉았다. 앉은 뱅이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펜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선에 돌아왔다는 소식도 전해주지 않고, 칠인회 형님들이 퍽 섭섭해 해요."
"감옥 갔다 온 게 자랑이라고. 일부러 전하지 않은 것인데, 뭐."
"여전히 다들 잘 지내고 있소."
"그렇겠지."
우리의 대화는 여느 때와 같았다. 형이 찢었던 투서의 얘기나, 요새의 유행에 관한 얘기. 그는 나의 새로운 시에 대해 물었다. 바다에의 묘사를 아름답다 칭찬했다.
"형은, 무슨 작업 하는 거요?"
"소설이지. 해진이 형 처럼 말이야, 나도-."
김해진. 그의 입에서 나온 해진 형의 이름이 어떤 사형선고처럼 귀를 울렸다. 이윤 당신의 죽음을, 그것도 종이 사이에 마지막 숨을 뱉은 김해진과 같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계속 다른 곳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말을 멈추고 가만 나를 쳐다보았다.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올 것 같아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오른손을 들어 아무렇게나 수염이 자란 그의 뺨을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나는 필사의 언어로 농을 던졌다.
"형 그거 알아요?수염이 이렇게 자라서는, 당신 얼굴이 꼭 제우스 신상같아."
연약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입술은 어색하게 웃고, 여전히 당신의 얼굴에 머무른 손은 잘게 떨렸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상실을 외면하려는 모습이 투명하게 전해졌을 게다. 급하게 손을 거두어 아플 만큼 꾹 쥐었다.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여전히 온기가 남은 손을 내 어깨에 올렸다.
"… …허. 내 몰골이 그 정도로 우스워?"
그러고는 이가 보이도록 씨익 웃는 얼굴에 나는 그만 아이처럼 울어 버렸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얼굴을 묻은 두 손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와 눈물이 동시에 흘렀다.
"… 두려워요."
"괜찮다."
"…."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다. 사실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천둥치는 이불속의 어린애처럼 무섭다 하는 말만을 반복했다. 결국 제 숨에 막혀 끄윽거리던 나를, 가만 안아주는 그에게서 또 다시 제우스를 떠올렸다.
"수남아."
"…."
"집으로 돌아가라. 내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
자신 때문에 슬퍼하는 벗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을까. 힘이 되어주고자 왔으나 아픔만 한아름 안겨준 꼴이다. 그는 푸석한 손으로 내 젖은 얼굴을 닦아주고는 벗어놓은 코트를 건네며 추스르게 하였다. 표정을 볼 용기가 없어 단추를 잠궈주는 손만 내려보았다.
"다음에는 빈손으로 오지 말고 술이나 꼭 들고 와라."
고개를 푹 수구린 채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쫓겨나듯 집을 나섰다. 목이 갑갑하여 급하게 찬 바람을 들이마시니 되려 기침이 터져 나왔다. 우습게도 나는 어떤 술을 사 가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일주일 뒤에 그를 다시 만난 곳은 장례식장이었고, 나는 술을 사 가지 않았다. 태준 형이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지난 번 해진이 형의 장례 때는 보이지 않던 세훈이도 꽃을 들고 찾아왔다. 환태 형은 걱정어린 눈으로 내 손을 꼭 잡아왔다. 나는 메마른 표정으로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태양 없이는 비도 내릴 수 잆는 까닭이다.
1. 바다
차가운 바다의 냄새가 여미지 않은 코트 사이로 스민다. 3월의 날선 바람이 회색 담벼락을 발랄하게 누볐다. 수남은 바다로 이어지는 골목을 걷는 중이다. 오랜만의 여행이다. 편집실 책상에 '쥬피타 추방' 원고를 달랑 올려놓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나왔다. 도피나 도망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만, 그는 이 행보를 스스로 여행이라 생각하였다.
함경도의 이 작은 항구를 목적지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그의 어릴적 고향집에서 겨우 20리 떨어진 곳이다. 어린 발걸음이 숨차게 뛰어 매일같이 찾았던 곳이다. 처음 시를 지었던 이유도 이 바다가 있기 때문이었다. 경성에 머물면서도 꾸준히 바다를 그리워했다. 길의 끝에 조그맣게 걸려 있던 바다가 점점 커지고, 마침내는 바닷가에 도착하여 넓게 트인 시야가 온통 푸르다. 하늘과 만나는 수평선이 원고지의 선처럼 반듯하다. 발 밑으로는 제법 부드러운 모래가 자갈과 뒤섞인다. 경쾌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또 한참을 걷자 검게 넓은 바위가 떼지어 모여있다. 그 중 파도가 직접 와 부딪히는 최전선의 바위를 골라 털썩 주저 앉는다. 천천히 숨을 마시며 눈을 감는다. 이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순간 떠올렸던 바다. 수남이 기대하는 바다는, 어두운 어떤 것들의 쓰레기통.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온몸에 스며들어 떨칠 수 없을 때 유일하게 마음을 씻어주는 것이었다. 그 마음에 부흥하듯 힘차게 다가와 부서지는 거품이 시인을 반긴다. 눈을 감고 작게 숨을 들이쉰다. 잃어버린 사람과의 기억을 잊는다. 암울한 시대에 관한 생각도 놓아버린다. 오로지 비릿한 항구의 냄새만이 차오른다. 홀가분하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바닥만한 작은 공책과 만년필을 꺼낸다. 바람이 제멋대로 페이지를 넘기려 하는 것을 꼭 눌러 잡고 시를 쓴다. 아니 쓰려고 했으나, 쓸 수 없다. 수많은 감정이 헤엄치는데 하나도 낚을 수가 없다. 시원하던 파도소리가 시끄럽게 변해 귀를 울린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도 이윤에게 바치는 시를 썼다. 바다를 보고 시를 쓰며,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떠나왔는데, 이제와서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은 억울하다. 아무런 단어라도 떠올리려고 애쓸수록 깊이 가라앉기만 한다. 실타래처럼 엉켜버린 생각을 떨치려 도리질 치고는, 움직이지 않는 손을 억지로 끌어 '바다'라고 적는다. '파도', '바람', '배', '구름'… 눈에 보이는 것들을 나열한다. 그는 어떤 문장을 생각해 내려고 한다. 글자의 순서를 바꾸어도 보고, 이리 저리 수식하는 말들을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가 아니다. 상상이 아닌 계산으로 부터 나온 말들이 쌓여 무덤이 된다. 그는 소리나게 공책을 덮고는 도로 펜과 함께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바다는 아무런 말을 한 적이 없건만 수남은 배신감을 느끼며 수평선을 흘겨본다. 하지만 누구의 탓을 할 수 있겠는가. 바다는 잘못이 없음을 그도 안다.
"…다 내가 어린 탓이지."
가만 중얼거리며 눈을 느리게 깜박인다. 바다는 대꾸가 없다.
여관 창문으로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햇살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결국 글 쓰기를 완전히 포기하고서도, 나흘을 매일 나가 바닷바람을 맞았다. 나른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창문을 연다. 밖이 완전히 밝은 것을 보니 시간이 늦었다. 여행자에게 정해진 일정은 없지만, 거의 점심이 가까우니 늦은 것이 맞다. 제법 익숙하고 여유롭게 나갈 채비를 마친다. 마지막으로 중절모를 눌러 쓰고 습관처럼 책상에 놓아 둔 펜에 손을 뻗다가, 멈춘다.
"어차피…."
글을 쓰려고 해 봤자 또 단어의 시체만 나열하게 될 것이 뻔하다. 언젠간 다시 쓸 수 있겠지. 조급해 하지 말자 다독이며 공책과 펜을 그대로 놓아두고 여관을 나섰다. 시간은 경칩(驚蟄)을 달리는데도 바람은 쌀쌀하기만 하다. 봄은 오지 않아, 거짓을 속삭이며 옷자락에 스며드는 한기. 그 단호한 말투를 애써 무시하며 같은 바닷가에 도착했다. 오늘은 비릿한 냄새로 마음의 구멍을 채우고, 밤에는 시도 쓸 수 있기를 바라며, 멍하니 수평선을 응시한다. 아니 바라보려고 했으나, 순간 시선을 빼앗긴다. 풍경의 오른편에 위치한, 바다의 두 팔에 안긴 작은 돌산. 그 위에서 요동치는 하얀 무언가.
처음에는 누군가 걸어놓은 하얀 천이 바람에 펄럭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천이 아니라 사람이다. 춤사위다. 제법 떨어진 곳이라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춤이었다. 눈을 깜박이는 일 조차 잊고 홀린듯이 바라본다. 파도 거품처럼 흰 옷을 입고 부서지는 몸동작이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래, 글로 서술할 수 없다. 그 천부적인 바다의 재능을 보는 순간, 그가 배워온 모든 글자, 모던의 지식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것이다. 물과 돌과 바람의 노래가 춤사위에 알맞게 귀를 울리다 흩어진다. 그는 문득 이제껏 그를 힘들게 했던 상실의 일부가 채워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공허를 마저 채우고 싶다는 충동, 구멍을 매꿀 수 있다는 희망이 자란다.
수남은 조금씩 겨울바다로 이끌려 들어간다. 바닷물이 그의 오른쪽 발목을 어루만지자 왼쪽 발도 따라 젖는다. 구두가 젖고, 바지가 젖고, 손끝이 파도에 스치다 어느새 축 늘어진 손목도 잠긴다. 중절모는 한참 전에 날아가 버렸다. 아마도 어느 파도가 훔쳐가 전리품을 자랑하며 시인의 흉내를 내고 있을 것이다. 돌산에서는 여전히 파도의 춤이 이어진다. 겨울의 날선 바람이 연주하는 왈츠가 위험하다. 점점 깊어지는 바다는 하나도 차갑지 않다. 오직 저 곳에 닿아 이 지긋하고 영원할 것 같은 상실의 끝을 본다는 기대만이 그를 지배한다. 그 때, 물 속에서도 가볍던 걸음이 누군가에 의해 멈춘다. 자신의 팔을 잡는 단단한 힘에 저항하려 했으나, 맥 없이 뭍으로 끌려 나온다. 늙은 어부였다. 모래장에 커다란 그물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무어라 소리치고 있는 듯 한데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눈을 돌려 다시 그 곳을 바라보지만 흰 것은 없다. 풍경이 흐릿하다. 까마득 정신을 잃는다.
2. 동화
"거, 계시오?"
흐억-, 턱끝까지 찼던 숨을 뱉으며 대문이 부서질듯 두드린다. 가파른 오르막을 뛰어오른 심장이 아리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오후가 무르익을 무렵 눈을 뜬 곳은 어부의 집이었다. '대체 뭐 하고 있던 거요. 그 위에는 무당집 하나밖에 없소. 얼마 전에-,' 젊은이를 타박하는 어부에게 짧게 감사를 표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여기까지 한참을 달려온 것이다.
쿵쿵. 쿵쿵쿵. 몇번 더 두드리자 문이 덜컹 열린다. 수남의 급한 마음과 다르게 아주 천천히, 높은 소리를 내며 열리는 작은 대문. 키가 작고 마른, 온통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눈을 위로 치뜬 채 그를 노려본다.
"누구."
"당신, 입니까. 춤을 추던, 사람."
노인은 어둡게 그림자 진 눈을 느리게 깜박인다.
"들어오시게."
고개를 숙여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대문 안에는 겨우 두 칸 짜리 낡은 집이다. 노인이 턱짓으로 방 하나를 가리킨다. 그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방 앞에 다가선다. 부자연스러운 나무 긁는 소리로 문을 연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한쪽 벽을 몽땅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창 너머의 바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는 사람이 있다. 하얀 저고리와 하얀 치마, 창백하도록 하얀 얼굴에 옅은 갈색 머리를 하나로 길게 묶어 내렸다. 모습을 이루는 선마저 펜으로 그린 것처럼 가늘다. 사람이 아니라 혼령을 보는 것이 아닐까 착각할만큼 온통 하얗고 희미하다. 아까 춤을 추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파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서도 그는 여전히 파도를 떠올린다. 여전히 수남을 등진채 창을 바라본다. 살며시 방 안으로 들어서며 헛기침을 해 보아도 미동이 없다. 무릎을 꿇고 앉아 콩콩 바닥을 두드리자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머리칼처럼 옅은 눈동자가 마주친다. 수남과 비슷한 연배, 아니면 조금 더 많을 것 같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갸웃거리다가 이내 얇게 미소를 짓는다. 맞잡고 있던 양 손을 들어 자신의 귀 옆에 가져다 대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보인다.
"아, 소리가-."
소리가 없는 사람인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다, 책상 위에 두고 온 펜과 공책을 떠올렸다. 이 집에도 펜이 있을까. 손으로 글씨 쓰는 흉내를 내 보인다. 하얗고 작은 손이 그를 따라 흉내를 내고는,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수남의 손목을 잡고 벌떡 일어난다.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문 밖을 나선다. 집 뒤쪽을 돌아 뛰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만 한 좁고 가파른 샛길이 바다로 곧장 이어진다. 수남이 크림처럼 고운 모래에 발을 헛디뎌 휘청이는 새, 그녀는 벌써 바다 가까운 땅에 자리하고 앉는다. 언제 꺾었는지 모를 나뭇가지를 건넨다. 아까와 같이 글씨를 쓰는 흉내를 내 보이며 시선으로 바닥을 가리킨다. 망설이던 나뭇가지가 모래를 파고들어 천천히 글씨를 새긴다.
[詩人]
몇날 며칠 시 한줄을 못 쓰고 괴로워 하는 자신을 시인이라 소개하는 것이 옳을까. 모래를 쓸어 글씨를 지운다. 역시 이름을 적는 것이 좋겠다. 모래 원고지를 바라보며 나뭇가지를 고쳐 잡는 순간 목소리가 들린다.
"작, …가?"
소리 없이 사는 사람의 음성은 아주 작고, 느리고, 구름처럼 뭉개진다. 하지만 공간을 가득 채운 파도소리를 뚫고 선명하다. 고개를 들어 소리의 주인을 바라본다. 이가 다 보이도록 활짝 웃으며, 수남의 손에 들린 가지를 빼앗아 글을 새긴다.
[恨]
[이름]
한. 파도의 춤과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모래를 흐트리고 다시 글씨를 쓴다.
[나에게 바다의 노래 들려줄 수 있어요?]
[당신의 詩로]
수남은 주저 없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그녀를 위한 시라면,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휘갈겨 땅에 새긴다.
[내일 아침 꼭 다시 나와요]
그러고는 여관으로 곧장 달려간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쳐다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수남이 찢어진 종이를 한 손에 들고 바다로 나간다. 이제 막 동이 튼다. 상기된 얼굴에 붉은 아침 해가 생기를 더한다. 매일같이 머물던 바위가 아니라, 그녀가 있는 돌산 뒤편의 해변가로 향한다. 멀리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하얀 형체가 이미 그곳에 있다. 수남은 곧장 달려 조금 구겨진 종이를 건넨다. 혹시나 바람이 훔쳐갈까, 그녀도 양 손으로 종이를 꼭 쥐고 천천히 잉크 자국을 따라간다.
[사람들은 너를 운명이라 부른다.
너를 울고 욕하고 꾸짖는다.
허나 너는 그런 것들의 쓰레배끼인 것처럼
한숨도 눈물도 욕설도 말없이 받어 가지고 돌아서더라
너는 그처럼 슬픔에 익숙하냐.]
한참동안이나 시를 바라보던 그녀가 종이를 소중히 접어 품에 넣는다. 천천히 팔을 들어올려 춤을 추기 시작한다. 파도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러나 젖지 않는다. 파도가 다가올 때에는 폴짝 뛰어 피하고, 때로는 파도를 밀어내고 드러난 땅에 과감히 발을 붙이기도 한다. 동작은 화려하지 않고 빠르지도 않다. 걸음을 옮겼다가, 양 손을 모았다가, 고개를 젖혔다가. 고요하지만 자유롭다. 멈춰 있을 때 조차 배 속 깊은 곳이 꿈틀거린다. 그것은 바다와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바람과 파도가, 그 공간을 이루는 모든 것이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춤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한명 뿐인 관객은 온전히 숨을 내쉴 수 있다. 시에 대한 완벽한 보답이다. 시인은 무언가 결심한 듯 다시 모래에 글자를 새긴다.
[나의 파도가 되어 주세요]
그녀가 글자로서 답한다.
[나비가 젖을텐데]
예상치 못한 답변조차 그를 설레게 한다. 자신을 완벽하게 감동시키는 파도에 영원히 젖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 이제 매일 매일 수많은 대화가 쓰이고 또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바다는 당신의 이름과 같은 노래를 불러요]
[恨]
사흘. 두 사람의 손에, 파도에, 바람에 온통 모래가 흩날린다.
[바다는 다만
어둠에 반란하는
영원한 불평가다.]
나흘. 바닷가는 원고지가 되고, 원고지는 또 다시 무대로 변한다.
[흰 모래둔과 구름으로 선을 친
바닷가에는
한낮이면 소년과 해당화가
일제히 피었다.]
닷새. 나뭇가지로 쓴 글자들 옆에 춤추는 발자국이 찍힌다. 조개와 같은 발자국을 보며 시인이 묻는다.
[왜 춤을 춰요?]
[기억]
그녀는 목소리 대신 모래 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춤을 추면, 동생을 기억할 수 있어요. 죽었거든요. 감옥에서. 우리는 제사도 지낼 수 없어요. 동생이 읽던 책, 입던 옷, 전부 순사들이 태웠어요. 춤을 추는 동안에는 떠난 사람의 기억이 살아나요.
[영원히 잊고 싶지 않아.]
정성스럽게 쓰인 글자가 호기심 많은 파도에 녹아 사라진다. 이번에는 그녀가 묻는다.
[왜 바다에 왔나요?]
[도망]
도망. 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힘주어 또렷하다. 나는 잊고 싶어요. 나를 떠나간 사람들. 어린 날 엄마와 누이를 잃었을 때도 나는 바닷가에 앉아 있었어. 사실은 아주 친한 친구의 죽음을 잊고 싶어서 이 곳에 왔어요. 친구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뚫린 구멍을 가지고 살기에는 너무 아파서. 비겁한가요?
그녀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기억하지 않아도 좋아요]
모래에 새겨진 마지막 문장이었다.
3. 해상
수남은 신발을 벗고 바다에 발을 담근 채 서 있다. 조용히 발목을 간질이던 파도가 조금씩 거세진다. 그것은 이내 얇고 날카로운 칼날로 변한다. 희게 빛나는 칼날이 그의 온 몸을 파고든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는 찢어지는 쇳소리가 된다. 순식간에 핏빛으로 변한 바다가 역으로 하늘까지 붉게 물들인다.
눈을 뜬다. 창을 뚫고 들어온 붉은 햇빛이 시선을 가득 채운다. 악몽이다. 다시 눈을 감고 긴 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프다. 머리에 바람 소리가 가득 두통이다. 흐린 눈을 여러 차례 깜박여 겨우 초점을 맞춘다.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꿈을 애써 생각에서 밀어내며 무거운 몸을 재촉한다. 밖을 나서자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도 쓰리다.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다. 내가 오지 않아 돌아간걸까. 샛길을 지나 무당집으로 향한다.
"아주 먼 여행을 떠나야 해. 봄이 지나면 다시 돌아와."
문은 열리지 않고, 노인의 목소리만 뱀처럼 넘어온다.
"잠시면 됩니다. 이렇게 갑자기 만날 수 없는 이유라도 알려주시오."
대답은 없다. 마음만 먹으면 넘을 수도 있는 작은 문과 담벼락인데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높다. 손가락 마디가 아프도록 문을 두드려도 그는 겨우 나비 한 마리 만큼의 힘도 낼 수 없다. 또 이렇게 상실이다.
방으로 돌아온 그가 쓰러지듯 주저 않는다. 바닷가에 있는 것도 아닌데, 시끄러운 처얼썩 소리가 귀를 찌른다. 꿈에서 보았던 칼날처럼 날카롭다. 떨리는 손으로 귀를 막아 보아도 소용이 없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일어설 수도 없었지만 정신은 또렷하다. 손을 뻗어 책상 위의 펜과 원고지를 잡는다. 엉켜버린 소용돌이 속에 떠다니는 단어를 붙잡는다.
[어둠의 바다의 암초에 걸려
지구는 파선했다.
살려라
나는 그만 그를 건지려는 유혹을 단념한다.]
평소와 다르게 번지고 흔들리는 글씨다. 그대로 펜이 떨어져 홀로 구르다, 누군가의 발 앞에 멈춘다.
"수남아."
"이게 누구야, 윤이 형 아니요."
수남이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는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온통 열이 올라 붉게 충혈된 눈으로 올려다 본다. 짙은 감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그에게로 다가와 앉는다. 큰 손이 이마에 닿아 시원하다. 눈을 감고 어지러운 숨을 깊게 내쉰다.
"많이 아프구나."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고 즐겁기만 해요. 그동안은 그러했어."
"돌아가자. 윤이 마지막 책, 니가 내어 줘야 하지 않겠니."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남자를 바라본다. 수남이 있는 곳을 찾아 몇날 며칠 수소문을 했을, 이태준이다. 수남은 대답이 없다. 경성으로 돌아가서도 시를 쓸 수 있을까. 이곳에 남는다면, 살 수 있을까. 이미 나의 파도가 사라진 바다는 죽어 버렸다. 죽은 바다 속에 나도 죽어갈 것이다. 생각한다. 바닷가의 모래를 가득 채운 글자 위에 한 구의 시체가 되는 상상을 한다. 마지막까지 펜을 쥐고 죽어간 사람들을 떠올린다. 애석하게도 이 어린 시인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한다. 눈 앞에 살아 있는 자의 옷깃을 구겨 쥐고 애처롭게 고개를 끄덕인다.
4. 바다와 나비
여름의 푸른 바다는 겨울의 바다보다 너그러워 보인다. 서양 물감을 쓴 듯 모든 색채가 한층 선명하다. 회색의 가벼운 옷을 입은 마음도 함께 발랄하다.
변한 것은 없었다. 여름날의 거리에는 맥고모자가 흔하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검열 때문에 <이윤 선집>의 발표는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명일일보 편집실에서는 글과 술이 끊이지 않았다. 단지 파도거품처럼 흰 초생달이 뜨는 날이면, 수남은 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뜨면 흐릿하게 파도의 춤이 그려지고, 눈을 감으면 선명한 바다의 반주가 들려왔다. 그런 날은 밤새도록 환청을 들으며 시를 썼다.
[오늘밤도 초생달은
산호로 판 나막신을 끌고서
구름의 층층계를 밟고 나려옵니다.
어서와요 정다운 소제부.
그래서 왼종일 깔앉은 티끌을
내가슴의 하상(河床)에서 말쑥하게 쓸어줘요.
그러고는 당신과 나 손을 잡고서
물결의 노래를 들으려 바닷가로 나려가요
바다는 우리들의 유랑한 손풍금.]
마을의 끝자락 돌산 위의 익숙한 작은 집이 보인다. 사람이 많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비집고 수남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옆에 있던 젊은 아낙이 말한다.
"무당 할멈이 죽었답니다. 퍽 오래 살았으니 이제 좋은 곳으로 데려가셨을 게요."
"여기 함께 살던 여자가 있지 않았소?"
"딸아이였지, 할멈보다 먼저 갔소.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중년의 어부가 대답하자 옆에 있던 꼬마아이가 끼어든다.
"돌산에서 춤을 추다 발을 헛디뎌 떨어졌어요. 내가 봤는데! 개구리가 깨어나는 날이었어요. 우리 형이 처음으로 나를 개구리 잡는 곳에 데려가 준다고 약속했던 날이거든요. 우리는 새벽에 일어났어요."
경칩(驚蟄)일까. 그가 처음 파도의 춤을 보았던 날이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부드럽게 모래를 밟던 하얀 발을 떠올린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 그녀가 앉아 있던 방 앞에는 신발이 없었다. 인파를 지나 집의 뒤쪽으로 향한다. 바다로 향하는 샛길이 없다. 검게 보일 만큼 짙은 초록빛의 잎들만 가득 시야에 들어찬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 않는다. 꺾인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어 땅에 대고 획을 긋는다. 흙바닥은 모래보다도 글씨가 선명하다.
[나를 기억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녀가 쓴 말이 이런 뜻이었나. 오히려 웃음이 난다. 실소가 새는 입술 위로 눈물도 함께 흐른다. 그게 살아있는 사람이었건 다른 무엇이었건 똑같다. 여전히 상실은 무겁다. 그럼에도
달라진 것이 있다면, 수남은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더 솔직하게는, 잊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이제껏 잊었다고 생각한 그 어떤 상실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도망치지 못했다. 그녀는 파도였고, 나는 나비. 바닷물이 날개에 스며 이미 나의 일부가 되었다. 날 때도 함께 날았고, 멈출 때도 함께 멈추었다. 나비는 마르지 않는다.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