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에 대하여
이윤 X @skehgid
낮이라는 시간은 찬란하고 눈이 부셔 깜빡할 사이 숨 가쁘게 지나가버리고 만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J군 L군과 둘러 술잔을 기울이고 앉았는 것이다. 그러다 취한 누군가가 『문학이란 무엇이오-』라고 외치면 다른 누군가가 『에-그것은 잠깐 놀음이오-』한다거나 『계몽이오-』하는 소리들이 왁자지껄 뒤따른다. 그러고 눈을 뜨면 다시 낮이오, 밤과 낮은 그리도 바쁘게 휙-하고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것이 졸업 후 나의 일과였다.
술잔을 기울이는 그 밤들엔 으레 싸움판이 벌어지고는 하였는데 H는 그런 수많은 밤들 가운데 한날에 만난 사람이다. H는 술에 취하면 퍽 난폭해지는 성향을 보이는데 그 날도 무언가 심사가 뒤틀린 겐지 한바탕 난리를 피워댔다. 나는 그저 구경만 하고 있다가 슬슬 힘에 부쳐 자리를 파하고 그만 돌아가려는데 가게 밖 한편에서 그가 기침을 한 사발 쏟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안되어 보여 등을 몇 번 토닥인 것이 몇 번 만나고 각자의 집에 들르고 서로 김형 이형 하게 되었다.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원체 말이 없고 점잖은 사람이라 그 이의 방에 들어 누워있을라 치면 그저 물끄러미 바닥이나 천장만 보거나 무언가를 끄적이는 게 일이었다. 『김형 글 쓰는 게 재밌소?』하면 그저 말그레하게 웃고는 다시 원고에 집중하곤 한다. 그러던 사람이 밤이 되어 술이 넘어간다 치면 열렬한 투사로 변모하곤 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그냥 술을 두어잔 더 먹여 픽-하고 쓰러질 지경으로 집에 데려가곤 했다.
한번은 여느 때와 같이 바닥에 누웠는데 H가 나를 쳐다보고 있어 『왜 그러오-』하니 『이형 글 좀 봅시다.』하며 원고를 가져간다. 여태 쓰던 것을 넘겨주고는 빈둥거리고 있는데 『김형 글은 나와 참 많이 다르오.』하는 것이다. 『글이 모두 같은 모양이면 쓰나.』하는데 『슬프구료.』하고는 한참 말이 없다. 『예끼- 그게 또 무어 슬플 것이 있어』하는데 대꾸도 않는다. 그저 사람을 등지고 둥그렇게 앉았는데 그 모양새가 하도 기구하고 가련해 더 이상 뭐라 말을 붙이지 못하는 것이다.
H는 원체 말이 없는 이였다. 누군가 무언가를 청하면 청한 이가 그 청한 바를 잊을 즈음에서야 『그렇소.』란 답을 뱉어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청한 이는 그가 답을 한 줄 모르고 대꾸도 없고 예의도 없는 이라고 치부하곤 하니 그의 몸통에 박힌 시계는 필시 세상의 시계와는 달리 가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 시계에 잘만 적응하면 꽤 대화가 통하는 상대다. 하루 왼종일 누워 서너 마디 물어보면 잊을 만 할 때쯤 답이 하나씩 오니 시간이 곧잘 갔다. 그런 이의 시계가 고장날 때가 있는데 자신의 글을 말할 때이다. 『이거는 아오? 저거는 아오?』 하며 한참을 못살게 구는 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잠자코 채비시켜 술을 마시러 가곤 했다.
묘한 데서 눈치가 빠른 구석이 있었던 것이, 술을 먹던 한 날은 그이가 은근슬쩍 내 술잔을 탐내길래 『거, 본인 앞에 잔이나 드시오.』했더니만 들은 체도 안한다. 병이 발병한 이래로 항시 각 잔을 마신지라 그이를 피하니 어느 순간 또 내 잔을 들고 있는 것이다. 심통이 난 나는 팩-하고 그 이를 내버려두고 먼저 일어섰으나 어느새 뒤따라온다.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고 무얼 그리 좋다고 남의 잔을 건드리나 그래,』했더니 『여보오- 나도 폐병에 걸렸소.』하고 속닥이며 해사하게 웃는다. 열불이 난 나는 『그래, 거 자랑이오.』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에 온 일이 있었다.
생긴 모양은 꼭 감자같이 생겼건만 병이 잘 걸리는 체질이라 치유가 될 때쯤이면 술을 들이붓고 또 다른 병을 얻어 항시 하나 이상의 병을 달고 있었다. 얼핏 보면 매번 같은 낯짝을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잘 보면 부르퉁할 때, 체증이 날 때, 울화가 치밀 때 조금씩 다르게 찌그러지는 것이 자못 다채롭다.
원체 내성적인 이지만 한번 입이 트면 세상 다정한 이인지라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이 퍽 아쉬워 이래저래 모임을 독려하곤 했는데 항시 그 특유의 우울한 인상으로 『부끄러워 싫소.』하며 거절을 놓는 것이다. 『부끄러울 게 무어가 있어』하면 『글이 부끄러워 그렇지』하고는 또 자기 글에 골몰이었다.
심약한 와중에 매 끼니는 챙기지 않아 여간 귀찮은 게 아닐 수 없었다. 며칠에 한번 들르는 날이면 책상에 엎어져 미동이 없다. 혹시나 싶어 콧구멍 근처에 손을 대보면 주인만큼이나 느린 숨이 바짝 약을 올린다. 짜증이 잔뜩 난 채로 있는 대로 사람을 줘 흔들면 『어, 윤이-』하며 눈꺼풀을 꿈뻑 꿈뻑 치뜨는데 영 볼썽사나워 『거, 죽으려면 곱게 좀 죽읍시다그려. 먹어야 글도 나올 거 아니오.』하며 채비를 독촉한다. 무얼 먹겠냐는 물음에 답도 없다가 겨우 채비를 마치고 문간에 서면 그제서야 『삶은 닭』하는 것이다. 그럼 또 부아가 난 나는 『고료도 못 받은 작자가 입도 참 금값이오.』하고 쏘아붙이고 만다.
싫다는 이를 어르고 달래어 억지로 칠인회에 갖다 붙여놓은 것이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서도 또 곧잘 적응하는 눈치인지라 옳은 일이라 생각했던 바 있다. 맘이 놓인다 할 때쯤 뒤늦은 열병에 시달렸다. 몸의 병에 이어 맘의 병까지 돌파할 모양으로 열심이었다. 죽기 전에 세상의 모든 병에 통달할 작정인지 징하게도 앓는 꼴이 보기가 안타까워 주변에서 한마디라도 보탤라치면 득달같이 『그렇지 않소.』라며 감싸고도는 것이 일이었다.
종국에는 제 고집과 같이 스러졌으니 남들이야 뭐라 하건 본인에겐 썩 만족스러웠을지 모르겠다. 그와의 일일(日日)을 끄적이는 연유는 빈둥거릴 바닥과 관찰할 등짝이 없어 심심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꾸만 툭툭 튀어나와 귀찮게 해대던 기침 같은 것들이 요 며칠 사이 잠잠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죽은 이의 흔적을 곱씹어보며 이리 궁상을 떠는 것 역시 그러한 까닭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