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일몽
이윤X @_2116720
백일몽白日夢 ; 한낮에 꾸는 꿈
글자가 빼곡이 채워진 원고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윤은 별 감흥 없이 그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보았다. 윤과 눈이 마주친 사내는 손에 들고 있던 원고지를 바닥에 쏟고는 씩 웃었다. 그와 함께 한 것이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나 윤은 그 존재가 무척이나 익숙하였다. 바닥에는 자신이 써내려간 원고지가 한가득 쌓여있고, 문과 창문이 모두 닫혀있는 실내는 담배 연기로 뿌옇게 흐렸다. 원고지가 흐드러지게 핀 꽃이라도 된 듯 정신이 몽롱하니 온통 몽중이다. 그곳에서 오로지 사내만이 뚜렷했다. 그것이 퍽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워, 그 존재 자체가 기이(奇異)였다.
이번 글도 대단해. 역시 내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군.
그런가. 윤은 중얼거리다시피 대답했다. 윤이 사내를 만난 건 김해진이 죽고 일주일 뒤, 그리고 그의 손에 펜을 쥐어준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윤이 글을 쓰지 못한 지 꼬박 한 달이기도 했다. 처음 사내를 보았을 때는 술에 취해 보는 환상인 줄만 알았다. 그도 아니라면 간곡함이 불러낸 망상이거나. 어느 쪽이든 현실일 리 없다고 생각했건만.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눌러 쓴 중절모와 머리부터 발 끝까지 검은 정장, 그리고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매. 그것이 실존한다는 걸 인정한 후에는 존재에 대한 의문이 뒤따랐다. 실존할 리 없는 것이 버젓이 제 눈 앞에 나타난 이유. 그리하여 입을 열기 전, 사내가 먼저 운을 뗐다. 이윤. 느긋한 말씨에 문득 소름이 끼친 것은 그때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만이 네 글을 이해할 수 있어.
윤은 손을 뻗어 그림자를 더듬는 듯 사내의 윤곽을 매만지는 시늉을 했다. 발 끝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듯 움직이는 손 끝은 마침내 얼굴에까지 닿아, 중절모 아래의 새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윤은 실없이 웃으며 손을 떨구었다. 사내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윤.
…….
내가 아니라면 누가 네 글을 이해하겠어.
달콤하게 스며드는 목소리는 마치 천사의 흉내를 내는 악마와 같다. 윤에게 가까이 온 사내가 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서늘한 감촉이 닿는 순간 머릿속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다. 견딜 수 없는 냉기에 피를 토해내면서도 그 황홀함에 눈이 멀어 기어코 펜을 쥐고야 만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이 머릿속으로 쏟아지니, 그 별을 감당하려면 기꺼이 제 삶을 바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윤은 잔기침을 뱉으면서도 사내를 오래도록 주시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제 글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낯, 목소리를 가진, 거울을 보듯 닮은 그가 아니고서야.
윤은 문득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여전히 정신은 꿈 속인 듯 몽롱했으나 원고지 위에 써내려갈 글만큼은 선명했다. 그러나 전부 다 환상 위에 덧그려진 것임을 알고 있다.
…백일몽이로군.
한낮에 꾸는 덧없는 환상.
금방 흩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럼에도 내가 필요하잖아.
사내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 윤의 목을 그러쥐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고스란히 윤의 얼굴이 비추고, 윤은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어. 네가 바라는 대로.
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을 이해할 이, 글을 읽어줄 이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그러나 결국 그런 사람은 오로지 나 하 나 뿐인 것을, 그것만을 절절히 깨달았다. 윤은 사내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리고 웃었다. 나날이 꺼져가는 생명을 소모해가며 글을 쓰게 하는, 나의 잔인한 뮤즈. 쏟아지는 영감과 눈부신 글, 머지 않은 죽음,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니 글을 써야지, 이윤.
눈을 한 번 깜박이자 목을 쥔 손도, 그리고 서늘한 냉기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윤은 무너져내릴 듯한 시야를 가까스로 붙들고 원고지 위에 펜을 올렸다. 그리하여 남은 건 오로지 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글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