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중 속의 고독
이윤 X @fanlet_blanche
*이상의 소설 ‘날개’, ‘종생기’ 등에서 일부 차용했을 가능성 있음.
이 윤 선생님은 천재다. 그리고 천재는 고독한 법이다. 그러므로 이 윤 선생님은 고독하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천재가 고독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원하지 않은 고독은 고독이 아닌 외로움일 뿐이다.
고독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쉬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 선생은 천재 곁에 있으면 당신의 정신이 피폐해진다는 말로 나를 떠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사실, 사람이 없어 외로운 것은 아니었다. 집 앞은 항상 – 글을 발표한 직후에는 특히 더 – 집 앞은 편지로 가득했다. 붉게 이-윤, 이라 쓰여진 편지, 분노를 이기지 못한 듯 욱여넣어 구겨진 편지, ‘이 윤이라는 작자는 미쳤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어쩌구가 갈겨진 편지. 편지도 아닌, ‘투서’라는 이름이 아주 잘 어울리는 종이 조각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모조리 집 마당에서 궐련과 함께 태워 버리고는 했다. 그러다 투서 중 눈에 띄는 편지를 보게 되었다. 꽃물을 고이 들인 엔-벨롭에다가 말린 꽃이라니! 이 투서를 쓴 작자야말로 미친 것이 틀림없다. 무어라 쓰여 있는지 보기나 하자- 하는 생각으로 엔-벨롭을 열어 보았다. 그 투서이자 빤-라타에는 이리 적혀 있었다:
이 윤 선생님 전,
선생님, 기체 평안하신지요. 신문에서 중지된 요상한 연재물은 유감을 표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의 도리이지요.
저는 요즈음 만물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것이라 서로가 잘난 것이라 뽐내 보이지만, 요상한 것 만큼 관심을 끄는 것이 없더군요. 저는 오로지 선생님의 글이 이해가 가지 않음에 희열을 느낍니다.
달콤한 말에는 재주가 없음을 선생님께서는 용서해 주세요. 그것은 사탕 발린 허상의 말을 하여 미래의 선생님을 더욱 큰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지는 않으리라, 하고 감히 예상합니다. 달콤한 것 대신에 씁쓸한 말로써 선생님을 연모할 터이니 그리 알아주세요. 저는 이월 십 칠일 오전 다섯 시 기차로 선생님이 계신 경성으로 올라갑니다. 선생님께서 편한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二月, 十日。정 소 혜。
나는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지구라도 터질 것만 같은 괴상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관련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연구하고 싶은 욕구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곧바로 아무렇게 널부러져 있는 원고지 뭉치에서 한 장을 꺼내 답장을 쓰게 되었다.
정 소 혜 前,
아가씨의 편지 덕에 나는 이상하게도 기운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소. 투서 가운데 빤-라타라니, 왜 투서와 함께 보내져 왔는지는 모를 일이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을 비꼬아 아이러니를 형성하는 새로운 형식의 투서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이 나의 글에 호기심이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믿고 있겠소. 날짜와 시간은 따로 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외다. 동이 트면 경성역에서 보도록 하지요.
二月 十六日, 이 윤。
날짜를 쓰다 말고 깜짝 놀랐다. 투서 사이에 끼어있던 편지인 터라 시간이 꽤 지난 편지였던 것이다. 지금은 이월 십 육일 오후 열 시, 그녀가 오는 기차는 오전 다섯 시. 편지를 보내는 것보다 그녀를 만나는 것이 더욱 빠를 것이다. 경성역에서 기다리지 무어. 궐련을 한껏 빨아들이고는, 그 궐련에서 타고 있던 불로 답장을 쓰던 종이를 태워 버렸다. 불길을 따라 노오란 원고지가 검게 물들어, 가루가 되어 책상 위로 떨어졌다.
...
二月 十七日, 午前 六時。이 윤 기상.
해가 붉어진 지 조금 되었다. 천천히 일어나 세안을 하고, 가장 최근에 산 양복을 꺼내 입고, 아직 조금 추우니 코트도 꺼내 입자. 조금 낡은 코트이지만 따뜻한 구실은 하기에. 준비가 다 되어서, 밖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미용실로 향했다. 외관에 보이는 모든 털을 다듬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제법 멋을 내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혼잣말을 하고는 경성역으로 나섰다.
경성역에는 사람이 많았다. 수많은 얼굴 모르는 사람들이 바쁜 얼굴로 서로를 스쳐지나고 있었다. 얼굴도, 나이도, 착장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여인을 찾을까. 아니, 그녀는 이 곳에 있을까.
"선생님?"
가녀린, 하얀 손이다. 그것이 나를 연하게 두드린다.
"...?"
"이 윤 선생님 아니세요?"
"맞는데, 누구시오?"
"소혜요."
"아, 그-"
"보고 싶었어요."
갓 스물이 된 듯하여 보이는 여인의 두 팔이 내 목을 감쌌다. 눈을 마주치자 그녀는 싱긋 웃었고, 나는 어색한 듯 눈을 이리저리 피해 보였다. 그녀는 한 쪽 손을 등으로 쓸어내리더니, 그 손으로 나를 다독였다. 그녀는,
“놀랐어요?” 라며 피식, 소리가 나게 웃는다. 입의 양 옆에 패인 보조개가 참 예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제 나가요, 라는 그녀 손에 이끌려 엉거주춤 함께 밖으로 나왔다. 밖은 조금 추웠고, 그녀는 많이 아래에 있는 곳에서 왔는지, 꽤 얇은 블라우스에 스커어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여행가방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어깨에 코트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히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하고 속삭인다. 정장 위에 코트를 하나 걸치고 오길 잘 했다. 이쯤하면 모더니스트의 매너는 다 했겠지. 혼자 뿌듯함에 젖어 작게 으쓱인다.
“선생님께서는 생각해 두신 장소가 있으신가요?”
…생각한 적이 없다. 그저 나를 보러 온다고 해서, 차려입고 나온 것이 다인걸.
“그러면 저희는 어디로 가야 하지요?”
…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소혜가 앞에 서고, 나는 그녀에게서 몇 발자욱 떨어져 그 뒤를 걸었다. 나무가 지나고, 전차가 지났다. 아까 역에서 바쁘게 걸어가던 몇 사람도 보았다. 조금 전에 역 주변에서 차를 마시던 여인도 있었다. 이렇게 수많은 머리와 다리들 사이에서, 우리 두 사람만 이 세상을 나란히 걷고 있다, 고 느꼈다.
걸었다. 하염없이 걸었다. 길을 모르는 그녀는 발이 닿는 대로 걸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되돌아 가 편집실에서 술이나 한 잔 할까, 생각하다가, 애써 고개를 젓는다.
아, 이쪽 골목으로 꺾으면 내가 가본 적 있는 카-페가 있다. 커피가 맛있던 곳, 카페인과 니코틴에 젖어 홀로 남아 하루하루 글을 쓰던 곳, 창작 욕구와 시상이 샘솟는 곳. 또한 제아무리 사람이 많더라도 고독을 느끼는 곳, 다른 사람과 함께 올 때에도 마찬가지로-
아차.
하지만 밖은 너무 춥다. 나의 앞에서 사뿐하던 두 다리도 이제는 떨며 제 상태로 움직이지 못한다. 얼른 들어갑시다, 하고는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코틴과, 타르와 제법 잘 어울리는 검은 빛의 물이 우리 앞에 하나씩 놓였다.
우리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커-피 한 모금, 잘 먹고 있는지 앞의 눈 한 번을 살피고, 쓴 맛에 미간에 주름을 한껏 내지었다. 설탕 한 스-푼 넣고, 그녀가 먹고 있는 건 맞는지 앞에 놓인 손가락을 한 번 더 살펴보았다. 또 그녀가 마시고 내려놓은 커피의 잔물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 앞에 있지만, 있지 않다. 나는 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다.
“...선생님?”
“...?”
“눈치 보지 마세요, 그러면 불편한데.”
“그러도록 하지.”
“저는 이 곳이 꽤 마음에 들어요.”
“그렇구나.”
다시 정적이 찾아온다.
…
그날 밤 一十 時, 그녀는 호텔로 돌아간 지 오래 되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혼자 밤새도록 술병을 기울였다.
무엇 때문일까, 그녀는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먼 곳에서 달려 올라왔고, 나 또한 그녀의 아이러니를 관찰하고 싶어 단장도 하고 나온 것인데. 하고 연구해 보았지만 아무 결론도 내지 못하였다. 술을 조금만 더 마시자. 물음이 풀리지 않을 때는 음주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몇 번 더 만났다. 그 여인이 카페를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항상 그 카페에서 만나게 되었다. 사람들과 그 여인 속에서도 나는 그 고독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고, 항상 그녀만 많은 이야기를 하고, 나는 짧은 맞장구를 쳤다.
“거울에서 해방되기 위해 거울로 들어가는 아이러니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렇-지.”
“자신의 꿈에 지각을 했다면, 그 꿈을 지배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야 모르지.”
그녀는 다른 의미로 내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시 연재를 그만둘 때도 온 나라에 ‘한동안 조용하게 공부나 하고, 정신병이나 고치겠다’던 사람이 당신 앞에서는 조용한 쥐새끼 꼴이라니. 반대로 그래서 그녀도 답답해졌나 보다.
“선생님, 선생님도 이야기를 해 주세요.”
“무슨 이야기?”
“선생님의 글에 대한 이야기요!”
“하고 있잖소.”
“선생님이 아니라 제가 이야기하던 거잖아요.”
“그래도 하고 있는 것 아니요?”
“그으-게 아니라, 연재 중단하느라 발표하지 못한 작품 같은 거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별 거 없소.”
“그게 다에요?”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솔직한 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곳에서는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선생님, 무슨 생각 하세요?”
“…”
“항상 나만 이야기했던 거잖아요, 선생님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잖아요.”
“여기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어.”
“제가 기다려 드릴게요.”
“안 그래도 돼.”
“왜요?”
“아파, 힘들어. 나 좀 내버려 둬.”
“선생님만 아파요? 선생님만 힘들어요? 나, 나도 선생님만큼이나 힘들어요. 선생님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선생님은 선생님만 힘든 것처럼, 나는 선생님만 기다렸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미안해.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랬죠.”
“…그렇구나.”
“그게 선생님 자신의 모습이겠죠. 선생님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으실 거라 확신하니까, 저는 이제 가 볼게요.”
그렇게 그녀는 등을 돌린다.
아팠다. 너무 아파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없었다. 이런 아픔이 몇 번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 고운 살에도 단단한 살이 굳어지듯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언제든 아픔에 쉬이 익숙해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녀의 뒷모습과, 처음 보았던 하얀 손가락이 멀어진다. 다리가 움직이고, 여행가방의 바퀴가 다시 굴러간다. 이 둘은 이제 떨지 않는다. 코트는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에 남아 있다.
정신이 아찔하다. 눈 앞이 하얘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나는 하얀 시야 속에서 홀로 허우적댔다. 세상이 기울어졌고, 붉은 액체를 토해 내는 바람에 바닥이 흥건했다.
일어나 보니 나는 위생병원에 누워 있었다. 급히 그녀를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조차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