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네
이윤 X @sealseal1111
* * *
“윤아, 이 시들은 언제 쓴 게야?”
안경을 고쳐 쓰고 집중하며 교정을 하고 있을 때, 태준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윤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 뭉텅이로 준 것들은 이번 달에 쓴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그 시 말이오? 이 시는, 보자…. 저번 주쯤 쓴 기억이 있구려.”
“음, 그래…?”
태준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영 미심쩍은 얼굴로 다시 원고지를 받아들었다. 이윤은 당황스러웠다. 뭐지, 저 형은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안 든다고 말을 할 텐데. 얼마나 심각하길래?
“형,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아니…. 여느 때처럼 훌륭한데, 흐음….”
“훌륭한데…?
태준은 말을 아끼려는 듯 망설이다가 숨을 토해내듯 답을 했다.
“문체도 시상도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까닭에….”
이윤은 무슨 소리냐며 원고지를 다시 받아들었다. -거의 낚아채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제 글이지만 훌륭하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천천히 읽다 멈칫, 손이 멈추었다. 태준은 그런 윤을 알아챈 듯이 조심스레 말을 얹었다.
“윤아. 아닐 거라는 거 알면서 하는 말이지만은, 요즈음에 만나는 사람이 있니?”
“윤이도 슬슬 청춘인 티를 낼 때가 되었지요, 형!”
문서 더미를 들고 지나가던 직원이 실없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이윤은 사색이 된 얼굴로 빠르게 부정했다.
“거, 아닐 거라는 거를 알면서 왜 물어보오? 아니오. 아니오. 절대 그럴 일 없소.”
“…그래. 네가 아니라면은 아니겠지. 하지만 윤아.”
윤은 어떤,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태준의 날카로운 관찰이 칼처럼 날아와 머릿속을 질주했다.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믿고 있지만 이렇게 두려운 까닭은 스스로도 그 뿐만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요즈음 정을 붙인 것이 무엇이든간에, 너무 동화되지는 말아라. 나는 네가 그것을 닮아가는 것이 조금 염려가 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형은 이 윤이가 그 정도 사리분별도 못하는 반푼이로 보이나 보오. 알겠소. 내 유념하리다.”
윤은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이 새로 생겼다. 이 습관은 본래 혜주의 것이었다. 좋지 않은 습관이라며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으면서 정작 어느새 자신은 옮아버린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윤은 손을 책상에 내려놓고 한참을 생각했다. 종이 다섯 번 울렸다. 곧 약속한 시간이었다. 이윤은 본인이 요즈음 거의 모든 시간을 그녀와 쓰잘데기 없는 대화를 하며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거기에 그럴듯한 핑계로 예술을 갖다대고 있다는 것 역시 깨닫고 말았으나 굳이 더 생각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윤은 쫓기듯이 약속장소에 이르렀다. 혜주를 다시 한 번만 보면 이 기분이 무엇인지 조금 더 갈피를 잡을 수있을 것만 같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낯선 불안감에 고요하게 잠겨가고 있을 때쯤, 혜주가 건너편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약속 시간보다 적어도 10분은 늦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미안, 미안하다 윤아. 친구가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
“친구?”
“아, 으응. 근처 음악학교의 또래 여자아이인데, 우연찮게 만남을 가지게 되었지 무어니. 아는 선생님께서 연결해주시기도 했거니와, 나도 꽤 흥미가 있어서….”
사람을 독점하고자 하는 욕구의 발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욕망이고 지저분한 바람일까. 이윤은 혜주가 자신과 보내기로 한 시간이 타인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사실에 먼저 불쾌감을 느꼈고, 제가 불쾌감을 느꼈다는 그 사실로부터 비참함을 느끼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 * *
말 그대로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는 어느 밤, 이윤과 혜주는 카페의 창문가에 앉아 바깥을 내려다 보았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고, 애써 매달리다 결국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윤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어렸을 때는 말이야. 어른이 되면 곧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혜주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진의가 무엇일까. 이윤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만히 있자 혜주는 피식 웃고는, 동화를 들려주듯이 느릿느릿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우리 어렸을 때 말이야. 하얀 감자꽃이 피면 나와 같이 그 사이를 걸어주던 아이가 있었어. 나보다 키가 한 뼘은 작고, 못 먹어 말라 비틀어졌었지만 그렇게 듬직할 수가 없었지. 나는 그 아이를 보면 마음이 설레었고, 항상 같이 있고 싶고, 그 아이와 함께 더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혜주는 윤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가 이윤이 아님은 분명한데도 말이다. 윤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었어.”
윤은 혜주가 ‘사랑’에 대한 제 의견을 피력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론 상대에 대한 예의를 지키듯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혜주는 윤을 또 한참을 살피다가 뱉어내듯이 말을 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거야. 네 말대로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니었나 봐. 이제 난 그 아이 이름도 떠오르지 않거든…. 네 말이 맞아. 세상에 사랑 같은 건 없어.”
윤은 그 순간 꿈에서 깬다. 아니, 꿈이 아니다. 이것은 어느 순간의 기억이다. 꿈 같이 한가한 것이 아니다. 이윤은 땀으로 푹 젖은 베개를 내려다보고, 숨을 헐떡이며 요동치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돈해 본다. 글이라도 써보려 원고지 몇 장을 집어들었지만 그녀를 배제하는 글을 쓸 힘이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에 드는 시가 쏟아져 나왔지만 전부 그녀의 것이었다.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윤의 눈을 가리고 사고를 더디게 한다. 황홀하고 찬란한, 같은 생각과 영감의 루-프에만 갇히게 한다. 이윤은 그 순간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던 사실 하나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혜주는 그의 뮤즈요 동지이자 사랑이 되었다는 사실을. 도대체 왜 하필? 어떤 계기로? 무슨 이유로? 그 천재라는 이윤마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땀에 젖은 머리칼을 제 멋대로 넘기고는 서랍을 뒤지어 본다. 원고지들이 바람처럼 흩어졌다. 그 중 아무 것이나 잡고 읽어도 혜주의 향을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잘못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윤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히려 무거운 당혹감이 되려 그에게는 확신처럼 다가와서일까, 초연에 가까운 자세로 그는 주저 앉았다. 태준 형에게라도 답답한 속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이내 그 생각은 접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까닭이었다.
그녀는 독약이다. 하지만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은 독약이었다. 이 와중에도 혜주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머릿속에서 그녀의 몽타주가 흐릿하게 번졌다.
그 순간 누군가 윤의 집 문을 두들겼다. 이윤은 태준에게 원고를 아직 다 전달하지 못한 것을 깨닫고,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할 요량으로 –제 엉망인 꼴이 어느 정도 그에게 동정을 살까 하는 생각도 없었던 바 아니다. - 문을 열었다. 하지만 윤은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다름 아닌 혜주가 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어쩐 일로.”
잠긴 목소리로 물음표 없이 묻자 혜주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음표를 잔뜩 묻혀 물었다.
“윤아, 너 어디 아프니? 안색이 영 창백한걸.”
“괜찮아.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그래.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니.”
혜주는 그제서야 생각난 듯,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나 동경에 다시 가기로 했다. 고민이 많이 되었는데 네 조언을 빛 삼아 결정하게 되었지 뭐니.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서, 그래서 다시 유학해보려고 해. 그 이야기 해주러 왔어.”
“……그래. 그렇구나. 잘 되었네. 잘 된 일이다.”
혜주는 윤의 상태가 영 좋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에서 혜주는 그의 공포를 읽었다.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아. 내가 나중에 다시 올까? 약이라도 사다 주어야 할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은거 맞니?"
이윤은 되는대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아니, 내가 갈게. 내일 18시, 우리가 처음 갔던 그 다방에서 다시 보자.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어."
"... 그래, 알았어. 좀 쉬고 밥도 챙겨먹어라. 알겠지?"
윤은 대답 대신, 미소를 조금 섞어 고개를 끄덕인 뒤 문을 닫았다. 다시 한 번 잠을 청해 보려 하였으나 또 꿈을 꿀까봐 그러지는 못했다.
그리고 시간은 쏜살같이 달려 다시 하루가 온다. 이윤은 혜주의 맞은편에 앉아,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처럼 고백을 한다.
* * *
이윤은 미소를 재배하는 방법을 잘 아는 청년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밭은 더없이 비참하게 파헤쳐졌고, 다시 는 복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직감했다. 사랑을 고백하는 일처럼 우스꽝스러운 자기위로가 또 있을까. 그러나 그는 해야만 했다. 말 그대로, 해야만 했다.
“나는, 사랑이라는 게 대관절 무슨 가치가 있는지 몰랐다. 아니,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았지 무어니. 지금 나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진심으로,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깊게 알고 있다.”
그는 울고 싶다고 부르짖는 눈을 억지로 휘며, 피곤한 입술 끝을 잡아 올린 채, 숨과 같은 고백을 내뱉는다.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맞아. 하지만 나는 적어도 지금 진정으로 당신을 원하고,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혜주는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열렬한 그의 고백에 잠시 멍해졌다. 이윤은 인위를 설계해내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보였고, 혜주는 누구보다 그의 구조를 잘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절망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들을 흙밭으로 잡아끌어 쳐박아버리는 것만 같았다.
“윤, 나는 당신을 끝없이 존경하고….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면 내 심장이 환희와 기쁨으로 뛰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윤은 그녀가 내뱉은 ‘그러나’라는 짧은 단어가, 아니 그 음절 하나하나가, 사형선고라도 되는 양 몸을 떨었다. 그는 눈을 감고,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예전의 그라면 필시 그렇게 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이제 옛날 그 ‘이윤’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었다. 이윤은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혜주는 입을 연다.
“나는 지금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나 때문에 그 놀라운 글을 써내던 당신의 뇌가 묶이는 것도 원하지 않거니와 나 역시 누군가에게 묶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꼭 나처럼 말하는군.”
“사랑하면 닮아간다는 말이 있잖아. 나는 당신의 글을, 당신의 속성을 사랑했고, 그러므로 당신을 닮아갔는데, 그래서, 이제는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 영혼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그럼, 그럼 한 번 더 우리 서로를 닮아가 보자.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을 한 통에 넣은 채 뒤섞고 흔들다보면 어느 순간 중간 온도를 찾기도 하지 않니.”
윤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살아있는 어떤 개인에게 ‘처절’했고,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건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잖아. 서로 반대편에서 시작해 상대의 잔상을 쫓으며 발을 구르고, 영원히 엇갈리는 그네를 타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윤은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비볐다. 언제나 끝은 어렴풋이 보였지만 제 눈으로 현실을 검토하는 일에는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겨우 스물 둘이었다. 자그마치 스물 둘.
“그네도 언젠가는 멈추지 않을까…….”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아. 그 언젠가가 오기까지 기다릴 여유가 나는 없…….” 혜주는 자신이 잔인했다는 것을 깨닫고 숨을 골랐다. 조심스럽게 윤의 말간 눈동자를 마주한 그녀는, 어떠한 경이에 사로잡힌 착각에 빠져들었다. 윤은 오히려 후련한 듯 예의 그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혜주가 다 하지 못한 말을 기꺼이 이었다.
“그걸 기다리기 전에 다른 빛을 쫓아 날아가 버리시겠군.”
혜주는 이윤을 따라 아픈 웃음을 짓는다. 날개, 날개가 보였다. 윤은 그녀의 어깨죽지에서 하이얀 날개가 파열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가르고, 활짝 펼쳐지는 환상을 보았다.
“나는 더 큰 세상으로 갈 거야. 그리고 그게 당신이 원했던 거야, 비록 지금은 잊어버린 것 같지만.”
그리고 그녀는 힘차게 땅을 떴다. 그녀는 그렇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뒤 이윤이 예의 그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꽃을 들고 기차역으로 찾아오기 전까지는.
* * *
"... 윤아, 나는."
"그냥 작별선물로 가져온 거니 이상한 생각 말아라. 하여간에 너는 설레발만 없으면 더 위대한 예술가가 될텐데 말이야."
윤은 웃음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기는 했다. 사랑이 그렇게 깊지 않았었다는 것을 보려주려는 듯이 더 과장스럽게 행동했다. 그가 가져온 라일락의 향은 너무나 좋았으나, 혜주는 이제 가야만 했다.
"윤아. 나는 가야해."
"어서 가. 잡으려고 한 적 없어."
윤은 또 능청스레 웃다가, 기차가 곧 출발한다는 소리에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편지해.”
그리고 한참 동안이나 정적이 흘렀다. 주변은 시끄러웠고 기차는 곧 출발할 것만 같았다. 윤은 혜주가 기차에 타도록 떠밀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혜주는 기차에 오르는 계단 위에서 이윤을 내려다 보면서 말했다.
“모르지.”
이 대답에 이윤은 비로소 크게 웃었다. 비로소, 진심으로 웃었다. 너무나 그가 알던 혜주와 같은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빈말로라도 다시 만나자고 하면 될텐데, 사실 그도 잘 아는 잔인한 사실을, 굳이 이렇게 말하는 혜주가 아직도 너무나 좋았다. ‘그래’라고 대답하기를 내심 기대하였으나, 다른 사람이라면 그랬겠지만 혜주는 아니었다. 윤은 그래서, 그래서 참 좋았다.
“그네도 말이야. 그 엇갈리던 그네들도 찰나 동안은 다른 그네와 만났겠지. 그 찰나면 충분해.”
“그 찰나의 힘이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지. 찰나의 힘으로 그네는 높이 날아오르는 것일지도 몰라.”
“당신을 잊지 못할 것 같네.”
“잔인한 말처럼 들릴수 있겠지만, 윤아. 차가운 불꽃 같던 네게 새롭고 좋은 경험이라도 되었길 바란다.”
기차가 조금씩 움직였다. 이윤은 기차의 움직임에 맞추어 걷다가, 뛰어야 속도를 맞출 수 있을 것만 같아지자 굳이 쫓아가지는 않았다.
그녀가 하는 말들은 대개 옳았고 비유는 항상 탁월했지만 틀린 것도 잇었다. 우리는 그네가 아니었다. 혜주는 그대로 날아올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윤은, 아니, 아니다. 같잖은 작가 짓은 이제 그만두자. 나는 한참을 앓았다. 나는 불행히도 너무 어렸고, 다행히도 너무 미숙했다. 지금의 내게 뮤즈가 나타난다고 하면 나는 어쩌면 해진 형보다도 더…….
* * *
“그 때 윤이가 스물 둘이니까, 수남이는 그 때 기자였었나? 그래서 몰랐나 보네. 난 아직 기억해. 그리고 나서 윤이가 한참을 글을 제대로 못 썼어.”
“그런 일이…….”
곧 동이 뜰 것만 같아 나는 옷차림을 정돈하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이 이야기를 해도 아프지 않을 때까지 5년이 걸렸다. 사실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너무 패여 더 이상 패일 것도 없는 것이지만.
“수남이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니. 솔직히 그래, 히카루같은 사람 만나면 우리라고 다를거 같소. 나는 그래서 해진이 형 원망스러울지언정 이해가 안되지는 않는다. 사실 그래서 더 막고 싶었어. 꼭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근데 형은 그것보다 훨씬 더 심했던거지.”
나랑은 비교도 안 되게. 나는 조금 애석한 기분이 들어 창 밖을 내다 보았다. 또 내일을 살아가야만 했다. 해진이 형은 없는 세상이지만 어쨌든 내가 사는 세상이다. 그리고 나는 또 사랑할 것을 찾아서 거리를 떠돌 것이다. 글이든, 시든, 음악이든, 사람이든. 뮤즈의 파편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들을 찾아서.